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년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 프로이센은 18만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3만 3천 명이 사망했다. 오스트리아군은 151,026명이 전사하고 19,592명이 실종, 17,388명이 장애를 입었으며 78,36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군은 20만 명이 전사하고 8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러시아군은 전사, 실종, 장애 인원 및 포로가 약 13만 8천 명, 영국군은 전사 및 장애 인원이 총 61,512명, 스페인군은 전사, 실종자 및 포로가 약 3만 4천 명이다. 스웨덴군은 2만 8천 명이 전사했다. 기타 국가 및 통계는 집계가 불가능하다.[* 출처: [[위키피디아]] 영문판] * 7년 전쟁은 참전한 모든 국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겼다. 전쟁 발발 전에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대부분의 참전국들의 재정 상태가 영 좋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서 수년간 사방에서 전투를 벌인 탓에 이미 전쟁 4년차인 1760년 경이 되면 모든 참전국들이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과거 유럽의 전쟁은 몇차례의 결정적 전투로 결판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큰 전투가 있고 난 뒤에는 이긴 쪽도 반년 이상 [[버로우]]하면서 천천히 세력을 회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한번 전투에서 박살이 나도 몇달 내로 같은 규모의 대군을 또 일으킬 정도로 싸웠다. 가장 부유하다는 영국조차 7년간의 전쟁 기간동안 정부 부채가 5천 8백만 파운드나 증가했는데, 이 액수는 영국의 1년 [[국민총생산]]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프로이센은 영국의 원조금을 받고도 부족해서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하는 극단적인 처방으로 빚을 해결해야 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장교의 수를 줄여야 했고, 러시아는 황태자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석을 팔아서 군자금에 보탤 정도였다.[* 이것은 보여주기식 행사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런 보여주기식이라도 해야할 정도로 재정악화는 심각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만약 전쟁이 한쪽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면 이긴 쪽은 상대로부터 많은 배상금을 뜯어내거나 새로 얻은 땅에서 세금을 걷어서 전쟁이 끝난 뒤에 어떻게든 해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은 백중세로 끝났고 유럽의 국경선은 7년 전쟁 이전과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고, 또 불구대천의 원수 프랑스와 혼인동맹까지 맺었음에도 또 패배하여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물론 슐레지엔 자체는 이미 전쟁 전부터 프로이센이 실효지배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잃은 것은 거의 없었지만, 이후로 두 번 다시 슐레지엔에 대한 영유권을 명목 상으로도 주장하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실패한 마당에 경제적으로도 손실만 본 전쟁이었다. 슐레지엔이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 세입의 22%가 걷히는 중요한 지역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수복하겠답시고 전비로만 무려 오스트리아의 11년치 예산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종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 국가 재정은 부도 직전이었지만 남편인 [[프란츠 1세]]의 뛰어난 재정 운용 능력[* 프란츠 1세가 자신의 지위를 통한 [[신용]]을 담보로 금융업을 운영하고 국채를 발행하면서 상당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미 전쟁 때도 매점매석을 이용해서 적국인 프로이센에게 전쟁 물자를 비싸게 팔아먹고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으로 불려놓은 어마어마한 왕실의 사유재산을 써서 재정 파탄은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을 통해 대외적 이미지를 일신하고 '''국력의 굳건함을 과시'''했다. 이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절 때 한 수 아래 국가로 보았던 프로이센에 계속 털리면서 '이제는 지는 해'라는 이미지가 박혔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프로이센과 대등하게 싸우면서 타국이 오스트리아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동맹의 역전]]으로 프로이센을 단숨에 포위하는 외교적 수완과 다굴에 힘입은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던 군사강국인 프로이센의 수도까지 털어볼 정도였다. 전쟁 준비와 수행 과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도력을 의심했던 [[헝가리인]] 귀족과 [[체코인]] 도시민들을 상대로 다시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고, 이후 프로이센에게도 오스트리아는 함부로 더 이상 도발하기 힘든 여전한 강대국이라는 위신을 새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어권 내 독보적인 일인자 지위에서 내려왔지만 대신 헝가리, 보헤미아 같은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 직할 제후령들의 힘을 재확인하면서 훗날 백여년에 걸쳐 밟게될 [[독일어권]] 내에서 입지가 약화하는 대신 독일과는 또다른 독자적인 중동부 유럽 열강으로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합스부르크 제국 입장에서는 분명 잃은 것도 있지만 나름 얻은 것도 있었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과거의 신성 로마 제국 황실이라는 중근세적 정체성에서 독일과 문화적으로 통하지만 비독일인들의 입지와 영향력도 막강한 중동부 유럽 다문화 제국이라는 19~20세기적 정체성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복잡하고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막대한 전쟁 피해를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전쟁 과정에서 국토가 초토화됐고 주변을 포위한 강대국들의 침공에 거의 단독으로 맞서야했으니 물리적인 손해는 프로이센이 가장 컸다고 할 만하다. 특히 장교진의 손실이 엄청났으며, 이 손실은 프리드리히 2세 사후에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해 결국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군에게 참패]]하여 [[틸지트 조약|굴욕을 겪는 주 원인이 되었다.]] 더군다나 슐레지엔은 이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부터 실효지배하고 있던 터라 승전으로 얻은 물리적인 이득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고하게 다져 오스트리아가 다시는 슐레지엔을 넘보지 못하게 했고 전 유럽에 프로이센의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였다. * 러시아의 표트르 3세는 이 전쟁에서의 실책으로 몇 달만에 부인 [[예카테리나 2세]]의 궁정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지나친 친독정책으로 전쟁 승리를 날려먹은 것에 대한 러시아 제국 내부의 반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정작 예카테리나 2세도 독일인이었다. 표트르 3세와 달리 빠르게 러시아화했을 뿐이다.] 무능의 대가로 표트르 3세는 폐위 후 목숨을 잃었다. 이와 별개로 이 전쟁은 러시아가 유럽의 국제 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었다. 러시아는 이전까지는 후진적인 사회구조와 경제 수준, 야만적인 문화 때문에 유럽의 일원으로 대우받지도 못했으며 아예 야만족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국제전에 러시아가 소방수 역할을 하면서 서구 열강 정치에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할만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7년 전쟁에서 국력을 거의 소진한 틈을 타서 [[러시아-튀르크 전쟁|7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일으키고 [[폴란드 분할|폴란드를 분할]]하면서 [[흑해]] 연안과 [[동유럽]]에서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인도와 북미의 식민지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이들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결국 이 재정난을 북미 식민지에서의 과세를 통해 메꾸려다가 북미 식민지 주민의 반발을 가져왔고, 결국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거기에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실책까지 저지렀는데[* 물론 [[7년 전쟁]] 이전에도 영국이 프로이센에 재정 지원을 하는 대가로 온갖 내정간섭을 해 프로이센 내부에서는 영국에 대한 불만이 꽤 있는 상황이었다.], 유럽 한복판에서 프로이센이 여러 강대국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해외 식민지를 싹쓸이하고, 심지어 재정지원까지 중단해 프로이센을 어려움에 빠뜨린 일까지 저지르는 바람에 프로이센은 영국에 원한을 갖게 되었고[* 영국은 의회제로 돌아가고 있었고, 이때 영국의회는 왕가의 본가인 하노버보다 영국의 국익이 중요하다는 논리가 주를 이루고 있어서 프로이센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프로이센으로서는 영국의 이러한 행태가 박쥐같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훗날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영국에게 엿을 먹였다. 심각한 재정난을 겪기는 했지만 영국 본토는 전란의 피해애서 벗어났기에, 그리고 대량의 식민지를 얻어내며 유럽의 패권국으로 부상할 준비를 갖췄다. [[파일:attachment/7년 전쟁/e0072368_49adad0777310.png|width=80%]] ☆본격 4배로 팽창한 영국의 북미 식민지 * 오스트리아가 이 전쟁에서 제일 망한거 같지만, 실제로 '''제일 쪽박찬 것은 프랑스'''였다. 오스트리아(그리고 러시아)는 명목상으로는 패전국이 됐지만 내부 결속, 군제 개혁, 국력의 건재함 과시 등 나름 얻은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루이 14세]] 말기부터 마이너스로 변하기 시작한 국가재정이 악화된 건 물론이고,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전체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인도 역시 영국에게 넘겨주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도 막대한 피와 돈을 썼음에도 얻은게 없었지만, 이번엔 얻은게 없는 수준이 아니라 '''참전국 중 가장 큰 손실을 보았다.''' 예전에 영국과 싸울 때는 영국 해군에게 해외 식민지는 털려도 강력한 프랑스 육군이 유럽 대륙에서 영토를 얻어냈기 때문에, 휴전 협정시에 유럽에서 얻은 땅을 빼앗긴 해외 식민지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프랑스군이 유럽에서도 전혀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식민지만 털리고 끝났다. 원래 계약대로라면 오스트리아로부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넘겨받아야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나마 설탕과 커피로 막대한 수익을 보던 생도맹그 등 [[카리브 해]]의 식민지는 유지해서 최악을 면하긴 했지만... 이러한 막장테크를 제대로 탔기에 [[루이 16세]] 때는 국고가 바닥이 나서 난리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왕인 루이 16세는 '''오로지 영국을 엿 좀 먹이려고(!!)''' 다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이기긴 했는데, 국가 재정은 더 악화되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 [[압스부르고 왕조]] 이후 17세기 내내 내리막길만 타던 [[스페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쳐 [[보르본 왕조]]가 들어선 이후 체질 개선에 성공해 16세기의 전성기까지는 아니지만 예전 열강으로서의 국력을 상당부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스페인은 7년 전쟁에서도 선전하여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으며 중남미 일대에 거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원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